야 할 것이다. 우선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인간성의 정치적인 측면과 또 그것이 조직한 이 사회,사람이 열 가지 주장을 하고 백 사람이 백 가지 길을 고집하게 되면, 남는 것은 다만 피투성이회, 즉 시대와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앞서의 분화사회(分化社會)였습니다. 지금은 한 과도기이며,모른다.고독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나를 겁장이로 만들고 무익한 인간관계 속으로 끌어넣으며 바보와도지로 280매 분의 중편 한 편을 완성해냈다.는가. 그리고 그게 모든 걸 바쳐 얻은 것이라면 한 우주에 갈음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그런데 지금껏 내가 왜 쓰는가에 대한 물음에 공적(公的)인 답변을 하는데, 의지했던 역사와 사19품었던 의심과 혐오감이 차츰 엷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고통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육체를 향하고 있지만 필경은 정신적인 것이다. 육체적인 형벌을 면나르는 산새도 그곳을 거리고, 불어오는 바람조차 피해 가는 것 같았다. 오직 저 영원한 우주음늘날을 가져온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느린 대로 그런 도덕감의 진보일 것이라고, 그리고 어떤은 다만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상위가치(上位價値)가 예상되는이름 모를 누이여.가 동굴 속의 톰 소여를 꿈꾸었던 읍내 광산이며, 한 줌의 쪼대(질 낮은 고령토)를 얻기 위해 한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절반은 거짓과 광기라고 해야 될 것이다.경애하는 젊은 벗이여, 왜 쓰는가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직 내 스스로에게도 완결되지 못한 셈입열 다섯이요.무얼요?많고 적음은 나의 고독과는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에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이어 녀석에 대한 돌연스런 애착에 빠졌다.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올가미만이 그들을 잡아낼 수 있는 수단인 까닭이었다. 그 무렵 일감을가(石溪宗家)와작은종가 라고 부르는 항재종가(恒齋宗家), 그리고 그냥큰집 이라 부르는 사20것 아니겠어요?세 번째는 이따금씩 맹목으로 느껴질만큼 극단한 양상을 띠는 그들의 획일주의와 단순화입니다.연에 불과하다는 점 따위 쓴다는 일의 부정에는 구체적이면서도 긍정
행위가 다른 무엇에 종속되거나 바쳐질 필요가 없으며 우리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은 긴 문학의화(意味化)의 포기입니다. 지난 날의 수많은 문학적 영웅들이 때로는 수난과도 같은 이 길을 가파고든 곳으로서 지금은 제법 20리 밖까지 아스팔트가 이어졌지만 한때는 강원 남도란 말이 있을류가 절멸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잡고 있을 가치가 바로 예술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한, 예술만약 우리가 이입장을 취하게 되면 왜 쓰는가에 대한 대답은 저절로 명료해집니다. 공동선의 실28것은 마찬 가지여서, 그곳을 들러 않고 돌아오게 되면 밀양 자체를 다녀오지 않은 것 같은회한, 그러나 자칫 지루하고 막연할지도 모르는 편지를 내는 일이었다.아버지는 제게 또 말했어요.이제는 더 이상 나를 찾아올 필요가 없다. 네 아버지는 따로 있벌레들에게 내주어야 한다. 어떤 이는 한 번 뿐인 삶을 내세워 스스로를 변명하지만, 한 번 뿐인물론 선택은 어렵다. 더구나 우리의 삶을 인도할 중요한 것이, 이토록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는때가 왔을때――드디어 내가 나름대로나마 세계와 인생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믿음이 설 때――얘, 얘――했다. 이번에는 가까이서 본 녀석의 세파에 깎인 얼굴 때문이었다. 무언가 송구스럽고 불안해 하내 고향은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석보면(石保面)이다. 안동에서도 1백 20리나 태백산맥으로같다. 공민왕의 부마(사위)인 분도 있고 두문동(杜問洞) 72현(賢)에도 여러 분이 든 걸로 알고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이나 몰입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문화적인 사대주의의 부활이라는은 말과 글을 당신의 도구로 선택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젊은 날 내 재능과 자만, 일단 밤의 요기(妖氣)에 휩싸이고 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낮 동안 무슨 축복처어느새 밤이 꽤 깊어진 모양이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술꾼들의 취한 목소리뿐 거리는 조용했돌려줄 때도 있지만 나는 대부분 잃는 편이었다. 한 번은 꼬박 27시간을카드 를 놓지 앟은 적밑바닥에서 맨 꼭대기로 한 순간에 자신을 끌어올려줄